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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정 본 당신, 서울에서 항일의거 흔적을 찾아보자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루도비꼬 작성일16-11-30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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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까지 가게만 해줘. 그거면 돼.”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은 이정출(송강호)에 간절하게 부탁한다.‘경성’까지만 가게 해달라고. 당시 항일 투쟁을 벌인 선조들에게 지금의 서울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 2천년사 일제강점기항일운동 편(한상도 외)’에 따르면, 일제는 서울에 권력집단을 집결시켰고, 식민지배 성공의 바로미터로 여겼다. 서울이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던 만큼 독립운동 측면에서는 서울이 식민지 조선의 항일투쟁의 구심이자 선도지역이었으며 도시라는 특성으로 인해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의열투쟁이 전개된 곳이었다.

     

     

    사진=영화 ‘밀정’ 스틸컷

     

    ‘항일운동측면에서도 서울이 갖는 비중은 매우 크다. 본래 도시는 익명성이 강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좋다는 점 때문에 조직활동의 거점노릇을 하곤했다. 서울 역시 같은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가 됐다. 경찰 또한 같은 이유로 서울에 탄압조직과 인력을 집중시켰다. 서울에는 사법, 경찰기구가 집중 배치되어 위법행위에 대한 통제도 가장 신속하고, 가장 먼저 노출되는 행정중심지였다.…(중략)…1930년대 말 일제가 중국 대륙과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는 시기에 이르면, 서울은 단지 거대도시로서의 외양뿐만 아니라 총독부 관리와 자산가 유지 그리고 지식인 등의 권력집단이 모여 식민지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이른바 ‘조선의 동경’이었다.서울에는 일본인이 가장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일본 국내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본의 문화가 가장 흡사하게 재현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직활동의 유리함과 정치사적 상징성,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물리적 공격 등을 위해 서울은 항일운동에서 특히 중요했다.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등 일제의 침략기관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폭탄의거, 경찰의 검문검색과 추적 등으로 인해 서울의 하루는 평안한 날이 없었다. 서울은 한국식민통치 핵심적 공간이었기에 서울의 치안을 확보하는 일은 식민지배의 성패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와 같았다.…(중략)…그런 면에서 조선총독부에서 불과 1㎞남짓 떨어져 있고 경성부 청사의 맞은 편에 있는 부민관에서 열린 침략전쟁 선전대회장에 폭탄을 던진 청년들의 배포와 용감성은 반일과 독립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중략)… 서울을 무대로 한 독립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흐름을 대변하고 선도했다. 40여년 동안 서울에 자리한 식민통치기관은 항일독립운동세력의 최종적인 공격과 파괴의 대상이 됐다. 이는 서울이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던 동시에 항일투쟁의 용광로였음을 대변한다.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해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울과의 연고를 강조하는 한성정부를 계승했음을 확인한 것도 사실은 서울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이 소재한 서울은 일제의 식민정책이나 통치방침과 관련한 정보가 생산되어 퍼져나가는 진원지였고 국외로부터 들어오는 세계의 정세와 한국독립운동 관련 정보들도 서울을 거쳐 보급되었다. 그렇기에 독립운동의 흐름이나 형태 또한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파 확산되어가는 양상을 띠었다. 반면 대도시로서 서울이 갖고 있는 입지조건으로 인해 서울을 무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기에는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그 대안적 형태로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한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강점기 항일의거를 다룬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항일 의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 곳곳에서 무심코 지나쳐온 항일 의거의 흔적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역사의 현장은 가까운 곳에 있다.

     

    서울역 광장 강우규 의사 동상.



    ①강우규 의사의 조선총독 투탄 의거

    지금의 서울역 대합실 앞은 강우규 의사가 의거를 벌인 곳으로 1986년 설치된 기념표석이 있다. 2011년에는 의거 92주년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1919년 3·1운동으로 당황한 일제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을 파면하고 사이토마코토를 신임총독에 임명했다. 신임총독 부임일인 9월2일 오후5시. 총독일행을 태운 열차가 남대문역(오늘날 서울역)에 들어서자 한양공원(지금의 남산공원)에서 예포 21발을 발사로 성대하게 환영했다. 이때 잠시 후 또 한방의 굉음이 들렸다. 강우규 의사가 군중 속에서 총독부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마차 뒤 11~12m 지점에서 던진 폭탄이었다. 

    일대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됐고 폭탄은 마차 7보 전에 불기둥이 일고 굉음과 함께 땅이 깊이 패었다. 마차 주위에 중경상자가 즐비했지만 총독부부의 마차는 광장을 빠져나갔다. 파편 몇 개가 마차에 명중하고 1개는 마차 뒤쪽 관통해 총독 가죽 허리띠를 약간 손상시켰다. 경성특파원 등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기마대가 애워싼 가운데 공교롭게도 한 소년이 한인 순사에게 강우규를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한인순사가 묵살해 강우규는 현장을 떠났다. 그러나 용의자로 수배된지 10여 일 만에 검거됐다. 1920년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구 서울역사 입구에 있는 강우규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수감 중, 재판 내내, 취조실에서조차 독립연설을 하고 변호사를 거부하는 등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요하현 신흥동에서 서울로 와서 옥바라지를 했던 아들 중건에게 “네가 만일 나의 처형됨을 슬퍼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내 자식이 될 뿐이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하 한 일이 너무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라는 요지의 유훈을 남겼다
    강우규의 사형 집행 중 아들 중건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어졌으며, 이후 유해를 인계했다. 일본식으로 시신을 앉혀놓고 입관한 사각형 궤짝을 인수받은 뒤 놀라 기절했다고 한다.

     

    현재 남산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근처에 있는 김익상 의사 의거 터.


    ②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파의거

    명동역 1번출구 서울애니메이션센터자리에는 김익상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기념표석이 있다.

    1921년 9월 12일 남산기슭 왜성대(지금의 예장동) 조선총독부 청사 비서과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이 두개가 터졌다. 첫번째는 불발, 두번째는 폭발해 건물을 파괴했지만 인명손상 없었다. 의열단원 김익상 의거로 밝혀졌지만 이미 국외로 탈출한 뒤였다.

     

    김익상 의사.



    김익상은 사이토마코토 조선총독 제거를 목적으로 폭탄 2개, 권총 2자루 휴대하고 베이징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이동 중에는 일본인 여성과 마주앉아 일본인 행세를 하며 경관의 심문 피하고 역을 빠져나오는 등 대담했다. 12일 오전 전기수리공을 가장하고 경계가 심한 총독부 정문을 피해 뒷문으로 들어가서 2층 비서과 출납여비계를 총독실로 오인하고 폭탄 한 개를 던진 다음 회계과장실에 또 한 개 던졌는데, 이때 회계과장실에 던진 것이 폭발해, 유리창을 깨졌고 마룻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사건발생 직후 목격자가 범인이 위에는 검은 옷, 아래에는 흰 옷을 입었다고 해 이날 검고 흰 옷을 입고 남산 공원에 올라간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검거됐지만 모두 사건과는 털끝만한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7개월간 혐의자로 검거된 사람도 그 숫자를 모를 지경었다. 사건은 미궁이었다. 6개월 후 상하이 황포탄 의거에서 김익상이 체포되고 나서야 밝혀졌다. 비상한 담력, 기민한 판단력, 임기응변의 민첩한 행동, 활달한 성격과 뛰어난 언변, 교묘한 변장술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③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영화 ‘밀정’에서는 김장옥이라는 인물로 재현됐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출구의 한 은행 건물 앞 인도에서 1988년 설치된 기념표석을 볼 수 있다.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안에는 1998년 설치된 김상옥 동상이 있다. 출신 학교인 효제초등학교 안에 김상옥 체육관과 의사비, 어록비가 있고 인근의 창경궁로와 율곡로를 잇는 길은 ‘김상옥로’로 명명됐다.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김상옥 동상.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현재의 종로구 종로2가 8) 서쪽 동일당이라고하는 간판집 모퉁이길에서 복면한 청년이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명중한 곳은 경무계 사무실. 유리창이 산산조각나며 근처를 지나가던 매일신보사원 5명,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폭탄파편과 유리조각에 중경상을 입었다. 의거 후 김상옥은 삼판통(현재 용산구 후암동) 매부집에 은신했는데 한인 형사 조용수의 밀고로 종로서 형사부장 미와에게 탐지된다. 1월 17일 눈 내리던 새벽 3시 경찰 수백명이 삼판통 302번지 매부 고봉근 집을 포위했고, 김상옥은 두손에 권총을 들고 치열한 항전하며 종로서 형사부장 사살, 지휘자 우메다 이마세 두 경부에 중상을 입혔다. 이후 남산으로 피신하자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해 남산을 포위하고 수색했다. 18일 새벽 김상옥은 장충단 근처 안정사로 들어가 승려로 변장해 효제동으로 피신했고 22일 경찰 수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포위해 교전을 벌였다. 경부 등 여러명을 사살한 뒤 최후의 총탄으로 자결해 순국했다. 김상옥의 나이는 34세였다. 이후 김상옥의 가족도 모두 가혹한 심문과 조사를 받았다.

     

    종각역 8번 출구앞에 있는 김상옥 거터.



    김상옥은 1919년 3·1운동 직후 지하단체 혁신단을 조직해 혁신공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채소장사로 가장해 광주리 밑에 신문을 숨기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혁신공보를 배포했다. 그러나 재정조달 한계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 국내 독립운동 자금 마련 등을 목적으로 길림 대한군정서에서 서울로 잠입한 김동순이라는 인물을 만나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해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의거를 준비했으나 일본경찰이 추격해 도피끝에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 후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3년 종로서 폭파의거를 결행했다.

     

    송학선 의사 거터.


    ④송학선의사 금호문 의거

    창덕궁 돈화문에 1995년 설치된 기념표석 자리는 송학선 의사의 금호문 의거 현장이다.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10분, 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기, 사토도라지로, 이케다 조지로 세 사람이 창덕궁 안 순종 빈소에서 나오는 순간 송학선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다카야마 다카유키의 오른편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다음 중앙에 앉은 사토도라지로 가슴과 배를 찌르고 재동 방면으로 도주한다. 수십명 기마경관과 순사가 추격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 교문 앞 골목 안에서 대치 중 체포됐다. 송학선은 이토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 의사를 숭배해왔고 자신도 사이토마코토 조선총독을 제거해 안중근 의사 뒤를 따라 순국하기로 다짐해왔다고 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교문 앞 골목 안에서 대치한 상황에서 구경하는 학생들에게 “만세 불러라, 만세 불러!”하고 소리친 사실, 재판정에서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고 대답한 사실 등에서 서슬푸른 그의 풍모 연상케 한다.

     

    송학선 의사.



    사건직후 강원도 경찰부에서 조사한 민심동향 보고서에는 “송학선의 행동이 대단히 용감하고 영민하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송학선 한 사람으로 인해 사회 일반에 적잖이 악영향을 끼쳐 양민에게 있어 실로 우려할만한 불상사가 일어날까 걱정되며 불량한 무리들이 이를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 고관암살 등 계획을 꾸미지 않을지 모르겠다”, “송학선이 안중근처럼 이름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우려했다. 사형으로 34세에 순국했다.

    ⑤나석주 의사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투탄의거

    영화 ‘밀정’에서 ‘황금정’이라는 옛지명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을지로에서는 나석주 의사의 투탄의거가 있었다. 현재 을지로입구에 1994년 설치된 한국외환은행본점자리에 기념표석이 있다.

     

    나석주 의사 동상과 기념표석.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중국옷 차림을 한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뒤 조선식산은행으로(지금의 롯데백화점 신관 자리) 들어가 대부계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폭발되지 않았다. 다시 2시 10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현재 외환은행 본점자리)로 달려가 권총을 난사하고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안전장치를 빼지 않아 불발됐다.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거리로 나와 달아나다 순사와 추격전을 벌였다. 송학선은 삼성당약국 앞 전신주 옆에서 일부러 넘어지며 자신의 가슴에 3발, 순사에 난사 후 병원에 후송됐고 4시간 후 숨졌다. 송학선은 자신의 가슴을 쏘기 전에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말아라”고 외쳤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해 보도금지 조치를 내렸고, 보도금지는 의거 후 17일만인 1927년1월14일에야 해제돼 뒤늦게 사건이 알려졌다.

    ⑥김시현의사 등의 폭탄, 무기 반입 의거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이 의거와 관련한 기념표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정출로 등장하는 황옥 경부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체는 파악되지 않는다.

    대규모 폭탄 반입은 ‘제2의 3·1운동’을 기획 차원에서 이뤄졌다.

    1921년말 상하이에서 의열단장 김원봉, 임정 외무차장 장건상, 김시현 등이 1923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와 일제재판소,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전기회사, 매일신문사 등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조선총독과 고관들을 암살해 민중 궐기를 촉구해 3·1운동과 같은 상황을 재현키로 결의했다. 이에 1922년 7월 김시현이 귀국해 폭탄 국내로 반입하는 공작에 착수했고, 1920년 9월부터 알고지내던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 황옥과 상의한다.

     

    영화 `밀정`에서 김시현 열사를 모티브로 한 김우진(공유 분)과 황옥 경부를 모티브로 한 이정출(송강호 분).



    1922년9월 장건상이 파견한 이현준이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편에 의열단 본부에 황옥 경부를 포섭했다고 보고한다. 12월 28일에 김시현이 김원봉으로부터 황옥을 대동하고 텐진까지 오라는 전갈을 받는다. 이때 황옥은 상사 허가 없이 외국 출장을 갈 수 없다고 해, 김시현은 혼자 갔다. 황옥이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연루자 수사명목으로 김시현 동지인 유석현과 일본인 경부보 하시모토 기요이와 함께 텐진에 왔고, 이때 황옥과 김원봉, 김시현, 유석현 등이 수차례 회담해 무기를 국내로 반입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협의한다. 이때 황옥은 김원봉에게 “비록 직업상 일제 경찰기관에 몸을 담고 있으나 조국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할 각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3월초부터 대규모 폭탄 반입을 위한 복잡한 과정이 시작된다.

     

    김시현은 유석현 등이 묵고있던 중국여관에서 김원봉으로부터 대형폭탄 6개, 소형대추폭탄 20개, 소형병모양폭탄 10개 기타부속품으로 폭발시탄장치용 시계 6개 등을 인수한다. 그중 대형폭탄 3개를 트렁크에 넣어 안동현까지 운반하고 수송중계소인 홍종우집에 맡겨두도록한다. 나머지 폭탄과 김원봉이 제공한 권총 3정 탄환 100여 발을 3개 트렁크에 나눠 담아 김시현, 유석현, 황옥 세 사람이 하나씩 들고 홍종우집에 옮긴다. 홍종우는 기생, 백영무 기자 등과 술을 마신뒤 취객을 가장해 대형폭탄 3개가 든 가방, 백영무는 2개가 든 가방, 이오길이 1개가 든 가방을 나눠들고 신의주로 들어와 백영무집에 보관한다. 3월10일 김시현은 나머지 무기 중 소형폭탄 20개를 유석현, 백영무와 나눠든 뒤 황옥을 앞세워 신의주로 반입한다. 폭탄 10개, 권총 탄환이 든 짐짝 하나를 시내 한성여관에 맡겨두고 나머지 폭탄 10개는 백영무 집으로 보낸다. 다음날 아침 김시현은 백영무 집에 맡겨두었던 대형폭탄 6개와 소형폭탄 10개 중 대형 3개와 소형 5개를 낡은 옷에 싸서 신의주역에서 경성부 효자동 조한석이라불리는 조황에게 부친다. 신의주에 있던 유석현과 황옥은 3월 11일 아침 소형포탄 10개와 권총 3정, 탄환 100여발을 버들고리에 담아 휴대하고 서울로 출발한다. 유석현은 개성에서 볼일이 있다며 하차하고 황옥 혼자 서울까지 와서 3월 13일 손가방에 넣은 소형폭탄 5개를 경성부 북미창정 김사용에게 맡기고 나머지 소형폭탄 5개와 권총 3정, 탄환 등은 조황에게 맡긴다. 그리고 조만간 더많은 무기와 폭탄이 경성역에 도착할 것이므로 잘 보관하라고 일러둔다.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 황옥경부 폭탄사건 재판 황옥(왼쪽),김시현



    이런 복잡한 과정으로 적지않은 수량의 무기와 폭탄이 반입됐으나 3월15일에서 19일 사이 김시현을 비롯한 18명이 검거되고 무기와 폭탄을 모두 압수당한다.

    황옥 경부와 관련, 고려공산당 수사를 벌이던 안동현일본영사관 경찰들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황옥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라는 정보보고 올린 바 있고, 평안북도 경찰부에서도 경기도경찰부에 황옥 체포를 요구하는 급전을 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국외의 고려공산당원과 의열단원들을 국내로 유인해 일망타진하려는 공작 차원에서 황옥으로 하여금 공산당에 접근하고 거짓협려고록한 것”이라고 요지의 답전 보낸다.

     

    황옥 개입에 대해서는 경기도경찰부장 등 조선총독부 경찰 고위층이 의열단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개입한 유인공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황옥을 일제통치기구에 편입돼 친일과 애국의 경계선에서 활동한 인물로 파악하고 그의 행동을 일본제국주의지배체제에 협력과 저항이라는 이중성과 양면성이 내포된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평가하는 연구 등이 있다.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합의부 공판에서는 김시현과 황옥에게 징역10년이 선고된다. 재판과정에서 황옥은 의거에 가담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재판에서 한 마디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형 선고 후 1년여만 복역한 뒤 신병을 이유로 형집행이 정지돼 가출옥한 사실 등으로 미뤄 경기도경찰부 공작에 의거해 황옥이 위장 참여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평가됐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참고 : ‘서울2천년사<27>일제강점기 서울의 항일운동’(서울역사편찬원, 한상도 외)에서 발췌 및 요약.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925151543678

    행복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미소짓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30 21:24:55 에덴의 동쪽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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